산딸기
발행일:나는 열대우림 사이에 혼자 서 있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하늘은 녹색 이파리들에 거의 가려졌다. 가지 사이사이로 빛이 비치지만 달빛은 아니다. 달은 저렇게 크지 않다. 자세히 보려고 해도 나무들이 너무 높이 자라 있다. 이번에는 땅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바닥에 난 오솔길은 두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너비다. 나는 덩굴을 헤치며 걷는다.
일직선으로 걸은 줄 알았는데 원래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다른 곳보다 나무가 적어 공터 같다는 인상이 든다. 주변보다 약간 밝은 곳에 수풀이 나 있다. 수풀 사이에는 검붉은 점이 알록달록하다. 어떤 열매지? 나는 잔가시를 피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나는 순간 손을 거둔다. 멀리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든다. 나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저 멀리서 괴물이 보였다. 괴물은….
어떻게 생겼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괴물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나는 다시 공터로 되돌아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괴물은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선풍기가 꺼졌는지 후텁지근하다. 이불보가 발끝에 걸렸다. 잘못된 자세로 잤나? 머리가 아프다. 밖은 아직 어둡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옷에 무언가가 걸렸다. 줄이다. 동시에 카메라 플래시가 불을 뿜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한참 후에야 겨우 섬광을 낸 것이 사진기라는 것이 떠올랐다. 2주째 방 안에 꿈 사진기를 설치해 놓았지만 일어나자마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줄을 걷어내고 일어나 불을 켰다. 삼각대 위에 조잡하게 설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엔 방금 찍힌 사진이 물려있었다. 나는 다가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플래시 잔상 때문에 코앞에 사진을 갖다 대서야 겨우 상이 맺혔다. 이번에 찍은 사진은 흐릿하기는 했지만, 어제 것보다는 선명해서, 세부 사항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밀림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안에 붉은 수풀 사이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전에 찍은 꿈 사진들을 보았다. 매일 찍었으니 지금까지 열 몇 장이 걸려 있다. 지난 5일간 찍은 사진들은 전부 배경, 나무의 수, 수풀의 위치까지 모두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이 다 너무 흐려서 세부사항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 하나였다.
눈에 맺히던 잔상이 이제야 가라앉았다. 나는 불현듯 침대를 쳐다보았다. 침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잎사귀가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벽지에 누군가 벤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체감상으로만 따지면 벌써 2시간이 넘게 흘렀을 거다. 땀이 줄줄 흘렀다. 렌코는 아직도 꿈 사진 속 붉은 수풀에 대해 찾고 있다.
“이 책이 아닌가 보다. 그 옆에 것 좀 꺼내줄래?”
“또?”
땀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아침에 찾아본 오늘의 최고기온은 36도였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옷에다 손을 문질렀다.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도서관에는 에어컨도 계단도 없었다. 렌코는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서라고 했다. 계단이 없으니 서가 높은 곳에 있는 책들을 꺼내려면 하나 있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나마 그 사다리도 습기에 어디가 썩었는지 계속 삐걱대는 바람에, 책을 꺼내는 시간의 8할은 순전히 책장 모서리를 붙잡으며 균형 맞추는 데 낭비되었다.
나는 표지도 보지 않은 채 열의 마지막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은 두꺼운데 손이 미끄러워 잘 꺼내지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빼낸 책을 렌코가 있는 책상을 향해 던졌다. 책은 한참 떨어지더니 렌코의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바닥에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가 이 위에서까지 들렸다. 도서관은 나랑 렌코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무안해졌다. 밑에서 렌코가 책을 집어 들었다.
“미안한데, 이 책도 아닌 것 같아.”
책을 잡았던 손이 끈적인다. 무더위에 책의 아교가 녹아 나왔다.
“야, 때려쳐. 그 책에도 없으면 없는 거야.”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위에서는 그렇게 삐걱대던 사다리는 내려올 때는 미동 하나 없었다.
내려와 보니 렌코는 내가 던져준 책들로 아주 책상 위에 산성을 쌓아두고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더라도 저렇게 열심히 하기는 힘들 텐데. 어쩌면 외부와의 단절이 사람을 몰두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기록적인 폭우에 산이 무너지고 나무들이 꺾여 대학교 밖을 나가는 모든 교통편이 끊긴 지도 벌써 한 달째였으니까.
나는 반팔 옷소매를 땀투성이 이마에 갖다 대고 거칠게 비볐다. 렌코는 계속 앉아있어서 덥지 않았겠지만 내 옷은 물을 끼얹은 마냥 땀에 젖어있었다.
휴대전화로 검색했을 때 결과가 바로 나왔으면 이 고생을 안 해도 되었을 거다.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나온 부분은 붉은 수풀 말고는 없었다. 제법 정확하다 생각했던 휴대전화의 사진 검색 기능은 유독 이번에만 엉뚱한 검색 결과를 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수풀이 전나무나 소나무일 수는 없었다.
차라리 사진이 지나치게 흐릿했으면 그걸 핑계로 조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핑계로만 벌써 며칠을 버텼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엔 붉은 수풀이 선명하게 나왔다. 하는 수 없이 식물도감을 찾으러 도서관에 올 수밖에 없었고, 나는 바보같이 책을 꺼내주겠다고 제안했다. 동물도감까지는 이전 서가 맨 아래에 있던 반면 식물도감부터는 서가 공간이 애매하게 끊겨서 다음 서가 맨 위에 꽂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꿈 사진을 찍기로 한 것부터가 잘못인 것 아닌가?
그때 갑자기 렌코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찔렀다.
“갑자기 왜 건드리는 건데?”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누구 저 위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고생할 때 누군 편하게 앉아서 남 찌를 여력도 있나 보지?”
렌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놀란 듯했다.
“아, 미안해. 나는 그냥, 다 찾았다는 거 알려주려고….”
순간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렌코는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웅얼거리고는 렌코에게서 도감을 건네받았다. 렌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같은 장을 보았다.
도감에 실린 식물은 사진 속 붉은 수풀과 꼭 닮았다. 식물은 장미목 장미과의 산딸기였다.
그런데 왜 처음에는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거지?
나는 책을 덮어 표지를 보았다.
`멸종식물 도감’
일반적으로 멸종 식물을 사진을 찍어 검색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학생 휴게실에서는 에어컨이 나왔다. 바람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나는 어정쩡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렌코를 보았다. 사진을 보고 있지만 얼굴은 편치 않아 보였다. 아까 내가 화낸 것 때문에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잔을 뽑아 하나를 렌코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
뭐라도 해서 죄책감의 여운을 지워내고 싶었다.
“…아, 고마워.”
렌코는 서툴게 캔을 땄다. 나는 책상 건너편에 가서 앉았다.
“그, 사진 좀 줄 수 있어?”
렌코가 사진을 건네줬다.
나는 뚫어져라 사진을 쳐다보았다. 밀림과 딸기 덤불. 오늘 아침에 어떤 꿈을 꾸었더라? 오전 내내 잊고 있었던 꿈의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괴물. 떠올려 보니 괴물은 열대 우림에 대한 꿈을 꿀 때부터 계속 나타났다. 하지만 벽지에 칼자국이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렌코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사진을 너무 오래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빨리 대화를 이어나갈 말을 찾아야 했다.
“아, 하늘.”
“하늘?”
렌코가 되물었다.
“꿈속에서 하늘에 달 대신에 지구가 떠 있었어.”
나는 그 정도 크기의 지구를 볼 수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한 군데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 그래, 맞다. 혹시 T 위성 기억나?”
“T 위성? 그래 그 몇 년 전에 연락이 끊긴 우주 정거장?”
렌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T 위성은 안 그래도 몇 년 전 한창 화젯거리였다. 그때 신문에서는 연일 T 위성 이야기가 나왔다. 얼마나 많은 국가 예산이 들어갔는지, 개발비 절반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어떻게 도량형 오류 하나 못 잡아서 연락 두절이 되었는지, 항공우주국이 어떻게 굴러갔기에 고작 10분 정전되었다고 위성 추적이 끊겨서 비싼 위성이 우주 쓰레기가 되었는지 등등.
“그런데 그 우주 정거장이 미소중력에서의 생태계를 연구한다고 희귀한 동식물을 가득 실었었잖아. 지금은 멸종한 것들도 많고.”
“그랬지.”
나는 맞장구를 쳐 주었다.
“동물은 뭐 도마뱀이나 곤충 말고는 싣지를 않았지만 그래도 식물은 많을 테니까, 위성에 가면 산딸기를 구해다가 학교 텃밭에 심자. 평생 합성 딸기만 먹고 살아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진짜 과일을 보는 거야.”
렌코가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사진을 알아낸 이번이 기회인 것 같아. 몇 달 전에 꿈 사진이 고비 사막인 것을 아니까 바로 같은 꿈에 들어갈 수 있었잖아. 덥기만 하고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렌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그때 꿈에서 깨고 나서 렌코의 발에 물집이 잡힌 것을 발견했었다. 똑같이 꿈에서 맨발로 달궈진 모래 위를 걸었던 내 발은 멀쩡했는데. 그때 나는 렌코가 흐릿한 꿈 사진으로 몇 번이고 되지 않는 공유몽을 시도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물집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었다.
“꿈 사진도 잘 찍혔으니까, 이번에는 오랜만에 네 꿈 안에 들어가는 거야.”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꿈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악몽은 꿈속에서 위험할 뿐만 아니라 꿈 밖에서도 위험하다. 지금까지 악몽을 꾸었다고 내 몸에 위해가 간 적은 없지만, 남 또한 안전할 것이란 보장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벽지에 난 칼자국을 생각했다. 그리고 렌코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위험했다. 괴물이 있는 이상 사고가 일어난다면 지난번처럼 가볍게 끝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일의 진전을 최대한 미뤄보려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렌코가 다친다면?
“이번엔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 지난번에 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쫓겼다고.”
결국 나는 고심했던 말을 꺼냈다.
“괴물도 있어? 훨씬 재밌겠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얼굴로 렌코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이 주 동안 계속된 집념을 위험하다는 말 한마디로 꺾어보려던 내가 어리석었다.
“우리가 하는 것 중에서 위험하지 않았던 게 어딨어? 걱정하지 마.”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둘이서면 뭔 일이 있어도 혼자보다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
별일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렌코는 몇 주 만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는 차마 못 하겠다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 준비하자.”
렌코의 기숙사 방은 좋게 말하면 창의적 사고를 할 만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난잡했다. 나는 굳이 내 방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쌓인 전공 서적과 기구들을 전부 침대 위에 집어 던진 후 우린 침대보와 배게 둘을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아침에 찍은 꿈 사진을 침대보 가운데에다 내려놓았다.
이 짓을 할까 종일 고민했는데 실제로 하는 데에는 우습게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렌코가 먼저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바닥 이거 생각보다 훨씬 딱딱한데.”
여름이라 그런지 8시인데도 밝았다. 나는 방 불을 끄고, 커튼을 걸고 돌아와 천천히 누웠다. 오른손에는 꿈 사진을 쥐었다. 사진이 뻣뻣해진 것이 렌코도 사진을 잡은 것이 느껴졌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 지난번에 공유몽을 꾸었을 때와 완전히 같은 방법이었다.
렌코의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눈을 감은 렌코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렌코의 볼은 약간 발그레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되돌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렌코의 숨소리는 조금씩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러다
렌코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열대우림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나뭇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목청껏 렌코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렌코를 찾아 달렸다. 다리가 아려왔지만 나는 계속 뛰었다. 오솔길은 공터로 통했다. 마지막 꿈에서보다 훨씬 넓은 공터였다. 공터 안은 어둡지 않았다. 머리 위에 지구가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지구를 올려다보았다. 지구는 달보다 훨씬 거대했다. 지구엔 구름이 어지럽게 끼어 있었다. 여기는 T 위성이 맞았다. 꿈이었지만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공터 한가운데에는 괴물이 있었다. 여태껏 꿈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컸다.
여전히 나는 괴물의 얼굴을 해석해 낼 수가 없었다. 자각몽 때문일 수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저것을 상대하지 못한다면 렌코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저 괴물을 죽이고 싶었다. 해치고 싶었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불현듯 내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칼에 의지하며 괴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했다.
나와 괴물은 이제 뛰어들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괴물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나는 물었다. 괴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에게는 손톱이 없었다. 나는 내가 손에 든 칼을 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괴물은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괴물을 없애버린다면 렌코가 지금이라도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꾼 꿈에서 나는 달렸었다. 누가 쫓고 누가 쫓긴 거지? 아릴 정도로 칼을 붙잡던 손의 힘이 풀렸다.
처음부터 괴물 같은 것은 없었다.
벽을 난도질한 것은 내가 한 일이었다.
괴물은 렌코를 과보호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어떻게 변명을 한다 하더라도, 렌코가 바라는 것은 이런 식이 아닐 것이다.
정말로 렌코를 위한다면 나는 놓아줘야만 한다.
칼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손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칼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렌코가 서 있었다. 괴물은 오간 데 없었다. 렌코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뭔 일 있어? 만나자마자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야.”
렌코는 조금 전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렌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단숨에 렌코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렌코를 으스러질 것 같이 꽉 껴안았다.
“메리, 갑자기 이게 뭐야?”
나는 고개를 뒤로 빼 렌코를 보았다. 렌코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프러포즈.”
렌코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뭐? 이런 곳에서?”
나도 내 얼굴이 주체 못 할 정도로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 나야 좋지만.”
렌코도 되받아치듯 나를 꽈악 껴안았다.
“지금까지 널 위한답시고 내 생각대로만 행동해서 미안해.”
렌코는 잠깐 말이 없었다.
“에이, 아냐.”
마침내 떨어졌을 때, 렌코는 웃고 있었다.
“김빠지는 소리 말고, 저길 봐봐.”
렌코가 가리키는 곳에는 붉은 수풀이 있었다.
“산딸기 기르자는 말 기억 나지? 가자.”